[매일뉴스] “수어통역센터 설치는 예산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권의 문제입니다.”
15일 오전 12시, 인천 부평구청 앞. 인천광역시농아인협회 소속 강화·남동·부평·미추홀 4개 지회 회원들과 다양한 장애 유형의 장애인 당사자 약 70명이 모여 군·구별 수어통역센터 설치를 촉구했다.
현장에는 청각장애인뿐 아니라 휠체어를 탄 지체장애인, 점자책을 들고 나온 시각장애인, 발달장애인 보호자 등 다양한 당사자들이 함께 했다.
이종원 인천농아인협회 부평지회장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인천시와 구청은 수년 동안 ‘예산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농아인의 기본권을 방치했다”며 “장애인 복지 예산을 조정할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어 “수어통역 지원은 선택이 아닌 법적 권리이자 인권”이라며 “행정의 무책임을 더 이상 농아인 당사자의 몫으로 전가하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날 농아인협회는 인천시장과 8개 구청장 앞으로 ▲군·구별 수어통역센터 설치 로드맵 수립 ▲예산 편성 과정에서 농아인 단체 참여 보장 등을 촉구하는 공식 서한을 전달했다. 인천시 관계자는 “예산 검토를 포함해 논의 중”이라는 원론적 입장을 밝혔지만, 협회 측은 “실행 없는 답변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며 향후 추가 행동을 예고했다.
장애 유형 넘어선 자발적 연대… ‘조직 아닌 개인’이 만든 집회
이번 기자회견은 기존의 단체 중심 장애인 운동과 달리, 개별 장애인들의 자발적 참여가 주도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휠체어로 참석한 김모 씨(37, 지체장애인)는 “단체 활동을 하지 않지만, 농아인들의 권리에 깊이 공감해 직접 나왔다”며 “‘소통과 접근성’은 모든 장애인의 공통 과제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점자책을 들고 참석한 시각장애인 이모 씨(45)는 “과거 점자 해독기 지원 운동 당시 농아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엔 내가 함께할 차례라 생각했다”며 깊은 연대의 의미를 강조했다.
이종원 지회장은 “장애인 커뮤니티, SNS, 가족 모임을 통해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집회에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며 “이번 행동은 특정 단체의 기획이 아닌 시민 스스로의 절박한 요구가 모인 집회였다”고 설명했다.
참가자들은 2시간 동안 “수어통역센터 설치 촉구”, “장애 유형별 맞춤 정보 지원”, “공공기관 장애인 편의시설 실태 점검” 등을 구호로 외쳤다.
지체장애인 박모 씨(29)는 “전날까지 농아인과 수어로 소통하는 방법을 연습했다. 서로의 권리를 지키는 연대야말로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발달장애인 보호자 최모 씨(53)는 “시청 홈페이지조차 장애인에게 접근성이 부족하다. 수어통역센터 설치는 첫걸음에 불과하다”고 꼬집었다.
전국 최하위 수준 인천 농아인 복지… “예산은 의지의 문제”
2025년 현재 인천시는 시 단위로만 수어통역센터 1곳을 운영하고 있다. 농아인 인구 약 2,500명(전체 장애인의 5.2%) 대비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농아인협회에 따르면 인천의 농아인 복지 예산은 전체 장애인 예산의 3%에도 미치지 못해 전국 최하위권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2024년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국 군·구별 수어통역센터 설치율은 41%로, 인천은 그에 크게 못 미치는 상황이다.
이종원 지회장은 “예산은 핑계일 뿐 의지의 문제”라며 “인천시가 이제라도 농아인 권리 보장의 선도 도시로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농아인협회는 앞으로 ▲1인 서명 운동 ▲장애인 개인 사연 공유 캠페인 등 생활 속 행동 운동으로 운동을 확산시킬 방침이다.
이번 행동은 단체 중심의 관성을 깨고, 장애 유형을 넘어선 개인의 연대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천시장과 구청장이 이들의 절박한 요구에 어떤 답을 내놓을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