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르네아데스의 판자
권영심
보통의 사람들은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는 말이 뭔지도 모르고 평생 들을 일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을 잘 모르고 써먹지 않아서일 뿐이지, 의외로 적용될 수 있는 예가 많다.
왜냐하면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란, 긴급 피난시의 정당방위를 가리키는 말이기 때문이다. 카르네아데스는 기원전 2C경의 키레네의 회의주의 철학자의 이름인데, 그가 행한 사고 실험으로 인해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라는 말은 인류의 도덕, 법률, 가치 기준으로 지금까지 회자되고 있다.
많은 사람을 태운 배가 난파해서 다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 사람이 난파선의 조각에 겨우 몸을 실어서 구명을 하고 있었다. 그 판자 조각은 정말이지 단 한 사람의 무게만을 간신히 지탱하 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이 헤엄쳐 와서 손을 내밀었다.
그때 판자에 의지하고 있던 사람은 그 사람의 손을 판자에서 떼어내어 익사하게 만들었다. 판자를 의지한 사람은 살았고, 그 는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은 지금도 우리의 형법에서 구구한 의견들 가운데서 적용이 되고 있다. 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다른 이의 목숨까지 구할 수 없으며, 도와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외면해도 법적인 처벌을 할수없음이 "긴급피난시의 정당방위"라는 개념으로 현대에도 여전한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정당한가? 를 묻는 가운데 무엇을 우선시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거의 인정이 되고 있다. 일상사에서도 의외로 많은 경우들이 있다.
집에 불이 났을 때,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두고 나올 수 밖에 없다면? 암벽 등반을 갔는데, 로프에 묶인 동료가 추락을 해서 그 로프를 끊어야만 목숨을 구할 상황이라면? 비행기가 추락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결국 인육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지경에 처했다면?
정신 이상이 있는 아들이 갑자기 난동을 부리며 부모를 패고 칼로 찌르려고 덤비는데, 아버지가 골프 드라이버로 아들을 때려 숨지게 했다면?...이 예시들은 모두 실제 상황이고 전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 우리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판.검사들이나 보험 회사가 최선을 다해 추적하고 밝히는 것은, 과연 이런 일들이 진짜의 긴급 피난에 적용되는 정당방위인지 그것을 빙자한 살인인지이다.
그렇게 해야만 했던 긴급하고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 자신의 무언가를 위해 살인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럴수가...하지만 그것이 인간이기에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는 오늘도 바다 위를 떠다닌다.
인간이란 지구의 만물 가운데서 가장 불가사의하고 다변적인 존재이다. 아무런 관계 없는 사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가차 없이 버릴 수도 있고, 욕망을 이루기 위해 가족의 목숨도 없앨 수도 있다 .
언젠가 굉장히 화제가 되었던 어느 드라마를 다시 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떠올렸다. 재벌의 가족들이 저마다 왕좌를 물려 받기 위해 저지르는 기막힌 짓들이, 하나같이 한 곳에 집중되는데, 그것의 보존을 위해서라면 못 할 짓이 없다.
회장직이라는 왕좌.
오십여년을 함께 살아온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살인청부를 하는 오직 한 가지 이유가, 다른 여자의 자식에게 왕좌를 물려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아들이 또 자신의 친모를 살인미수로 고발 하는 이유가, 자신의 자식에게 왕좌를 물려주기 위해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새며느리는 임신을 하자마자 이 아이가 왕좌를 물려받을 수 있게하기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하겠다고 이를 악문다... 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를 잡은 자의 운명이라고 치부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살인도 아무렇지도 않고 정당하다는 이런 인간상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다. 친구도, 가족도, 아내와 남편조 차도 그 판자를 잡으면 가차없이 밀어내버리고 자신을 정당화 시킬 수 있는 내용들이 실제적으로 현실에서 점차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과연 누구의 책임일까?
의식의 변화를 주도하는 것은 많지만, 지난 세기에서부터 방송의 역할은 거의 전부일 정도로 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마치 서서히 물에 젖어가면서 이윽고 변한 것을 나중에야 알아지듯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는지 모른다.
이십여년 전 만해도 총각과 돌싱의 연상의 여인이 결혼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가 둘 있는 이혼녀가 열 살 연하의 남자와 결혼해도 뭘 그럴 수 있지...이런 분위기다.
고부간의 위치를 뒤바꾸게 만든 것에도 방송은 크게 기여했다. 예전엔 부모의 유산을 받으면 고맙고 감사했으나 지금은 당연히 받을, 내 것이다. 그것을 부모가 마음대로 쓰는 것을 상속자가 용서하지 않는다.
혼자인 아버지가 결혼하려고 하자, 모든 재산을 자기 앞으로 돌려 놓고 하라고 소리치는 아들이 떡하니 드라마에 나오는 세상 이다. 그러더니 얼마 전부터,자신이 가져야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 무언가를 위해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드라마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더욱 많아질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죽여야 더 잘 죽이 는지가 흥미의 소재가 될 뿐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용인되었던 카르네아데스의 판자는 이제 누구든지 가지게 될 판이다.
"누구를 어떻게 죽여도 나는 정당하고,나는 살아야 당연하지만 내 판자에 손을 댄 손을 댄 누구라도 나는 밀어낼 수 있어!"
우리는 앞으로 어떤 시대를 살아가게 될까?








